신학적 상상력으로 기독교 경전 읽기
창조의 아름다움 : 창조의 시간
세계적인 미래학자요, 클레어몬트의 스승이었던 피터 드래커(Peter F. Drucker)는 그의 저서 『프로페셔널의 조건』에서 21세기 전문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간을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는 시간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시간은 다른 자원과는 달리 한정된 자원이다. 시간은 빌릴 수도, 고용할 수도, 구매할 수도, 혹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소유할 수도 없다. 시간의 공급은 완전히 비탄력적이다. 아무리 수요가 많아져도 시간의 공급은 늘릴 수 없다. 시간에는 가격도 없고, 한계 효용 곡선이라는 것도 없다.게다가 시간은 철저하게 소멸되는 것으로서 저장될 수도 없다. 어제의 시간은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간은 언제나 심각한 공급 부족 상태에 있다.”(p.188,189) 드래커는 가장 희소한 자원인 시간을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어떤 일도 관리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시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시간에 대한 놀라운 경영학적 통찰력이다.
시간이란 무엇인가?(Quid est tempus) 시간에 대한 본질적 물음을 던져보자! 기독교의 경전은 ‘테초에’란 그 어떤 시점으로부터 경전의 문을 연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태초에’는 온 우주 만물이 창조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 시작한 때이다. 이 ‘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참으로 중요하다. ‘태초에’란 말을 사용하는 책이 성서 외에 또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태초에’란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브레쉬트’란 말이다. 이 말은 ‘시간’을 나타내는 말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태초에’란‘시간(time)’이 있기 이전, 그리고 그 어떤 ‘존재(being)’가 있기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초에’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처음에’ 혹은 ‘첫 시간에’란 말과 차이가 있다. ‘처음에’ 혹은 ‘첫 시간’은 시간 속에서 시간의 어느 시점을 나타내는 ‘상대적 시간(relative time)’의 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교 경전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하는 ‘태초에’는 시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한다. ‘태초에’는 피조물의 영역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때가 아니다.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의 영역에서만 이해 될 수 있는 때이다. 그것은 피조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의 때이기 때문이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그의 『고백록』 11권 3장에서 ‘창조의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모세가 기록하였으니 모세가 살아있다면 그에게 직접 그 의미를 물어보고 싶다고 고한다. 어거스틴은 ‘시간(time)’을 ‘영원(eternity)’과 구분한다. 과거, 현재, 미래로 경험되는 시간은 ‘영원’의 피조물에 불과함을 나타낸다. “그들은 또한 과거란 항상 미래에 의해 밀려나고 미래는 항상 과거를 뒤?지만, 과거와 미래는 둘 다, 영원한 현재 안에서 창조되고 흐르게 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누가 인간의 마음을 붙잡아 고요히 머물러 있게 하여, 과거나 미래의 시간이 아닌, 즉 항상 머물러 있는 저 영원이 어떻게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지시하시는지 알아볼 수 있게 하겠습니까?”(『고백록』, 선한용 역, 392)
우리는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경험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 가지 시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은 우리의 영혼(마음) 속에 있을 뿐이다. 과거란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다. 단지 우리의 ‘기억’ 속에 있을 뿐이다. 미래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다. 단지 우리의 ‘기대’ 속에 있을 뿐이다. 단지 현재의 시간만을 ‘직관’한다. 그러므로 ‘과거 일의 현재,’ ‘현재 일의 현재,’ ‘미래 일의 현재’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현재’라는 일각의 순간 뿐이다. 그 순간도 영원히 머무는 순간이 아니라 사라져 버리고, 흘러가 버리는 순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모든 순간이 ‘영원한 현재’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간 속에서 시간을 넘어 영원한 현재로 변함없이 현존하신다.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말한다.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자’이다. ‘태초에’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함께 ‘시간’을 창조하시기 시작하신 때이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과 ‘영원’의 질적인 차이를 알게 된다. 세상에 누가 ‘태초’를 말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태초’를 경험하신 분이시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을 이렇게 정의한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 상대적 시간의 처음이 아니라, 절대적 시간의 처음과 마지막을 논할 수 있는 존재는 시간의 창조주, 하나님 밖에는 없다.
다윗은 시간 속에 속한 자신의 존재의 연약함과 짧음을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시39:4,5). 이것이 ‘영원’이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생의 모습이다. 우리의 일생이란 ‘한 뼘 길이’ 만한 일각의 순간일 뿐이다. 영원이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는 마치 ‘없는 것’, 즉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 존재이다. 이런 존재가 ‘태초’의 시간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타당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영원이신 하나님이 붙잡아 주지 않으시면, 그 한 뼘의 순간도 존재하지 못할 인생이 바로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네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