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상상력으로 기독교 경전 읽기
창조의 아름다움 : 힐링의 사건
세계적인 실존분석의 거장 롤로 메이(Rollo May)는 그의 책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에서 현대인의 불행의 요인을 ‘공허감’과 ‘고독감,’ 그리고 ‘불안감’ 안에서 찾고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이전에 이미 이런 모습들이 세계 내에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어찌 보면, 현대 후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아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인간을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상태로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을 배반한 유다 민족의 삶의 자리를 예레미아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렘4:23)
하나님 창조의 역사가 없는 곳에는 언제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계가 존재한다. 첫째로, ‘혼돈’은 히브리어로 ‘토후’란 말이다. 그 문자적인 뜻은 ‘성읍이 무너져 뒤범벅이 된 상태’을 가리킨다. 의학적으로 혼돈(confusion)이란 용어는 정신분열증을 일컫는 일종의 질병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이런 현상이 뇌에 산소가 부족하거나, 혹은 뇌 속에 종양이 전이 될 때 일어난다. 그렇다면, 뇌 속에 산소를 공급하거나 종양을 제거하면 정신분열증을 치료할 수 있을까? 치료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학적으로 혹은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영역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볼 때, 혼돈은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 결핍된 삶의 상태이다. 혼돈은 결코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둘째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없는 곳에는 ‘공허’가 가득하다. 공허란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속이 텅 비어 있는 상태’이다. 이것을 우리네 삶에 적용해 본다면, 삶에 그 어떤 희망도 발견할 수 없는 ‘전혀 의미 없는 삶의 상태’를 가리킨다. 당신은 우울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할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우울증이 큰 질병으로 취급되질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어린 아이를 포함해서 모든 연령층에 이르기까지 그 증상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우울증의 근본 원인은 바로 ‘공허감’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거나, 혹은 갑자기 생에 대한 심한 공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울증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짧으면 한 달, 혹은 길면 6개월이나 1년씩 지속되기도 한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 월간지인 『Psychology Today』의 통계에 의하면, 매년 미국에서 9백만 명의 성인들이 우울증에 걸린다고 한다. 그 중에서 15%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우울증! 분명 에이즈 이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무서운 현대 질병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의학계에서는 그 원인을 유전적, 즉 생물학적 차원과 더불어 심리학적 차원에서 발견해 왔다. 그래서 1950년대 이후로 항우울증이라는 약을 개발하여 치료하고 있다. 그러나 별로 효과를 보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요즘 가장 보편적인 치유 방법으로 상담을 활용한다. 서양의 상담학은 거의 모두가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인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인간 심리이론에 근거해서 행해지고 있다. 프로이드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심리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지금도 그의 이론은 심리학계의 교과서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무신론자(A natural atheist)라는 사실을 아는가? 그는 『토템과 타부(Totem and Taboo)』라는 그의 책 속에서 종교의 본질을 ‘환상’이나 ‘허상’으로 정의하였다. 그에 의하면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진리는 모두가 인간의 무의식에 의해 투영된 한낱 투사물에 불과하다. 신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무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나는 알았으나 둘은 몰랐던 프로이드. 만약 그렇다면, 그 무의식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미국 유학 생활 중 필자가 프로이드의 전문가인 클레어몬트 상담학연구소 소장인 클레멘트 교수에게 이 질문을 던졌더니 매우 당황해하면서 “프로이드는 그런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고, 그런 질문에 답을 한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이런 사람의 이론을 가지고 아무리 상담해 보아야 궁극적인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19세기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1849년에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그 책 속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알 수 없이 밀려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감이 바로 인간을 죽음으로 밀어 넣는다는 것이다. 우울증과 함께 이것은 매우 무서운 현대의 정신 질환 중에 하나이다.
통계청 보고에 의하면, 2003년 한국인 사망 원인 중 자살이 드디어 교통사고를 앞질렀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2003년 한 해 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무려 1만 3005명이였다. 40분에 한 명씩 자살한 셈이다. 인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이 무서운 정신 질환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이 해답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4:4)는 예수의 음성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진리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없는 곳에는 언제나 ‘흑암’이 가득하다. ‘흑암’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빛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세상에는 빛이 없었다. 이 말은 대단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혼돈’과 ‘공허’와 마찬가지로, ‘흑암’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그 어떤 실체(reality)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빛의 결핍 일 뿐이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흑암’을 단지 ‘빛의 결핍’ 상태로 정의하였다. 즉 어두움이란 단지 빛이 부재한 상태이지, 결코 존재하는 그 어떤 세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어두움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빛이 비추어지면 그것은 자연히 사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우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혼돈’, ‘공허’, 그리고 ‘흑암’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단지 ‘무’(nothing)일 뿐이다. 아무런 존재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은 이 ‘무’를 두려워하거나 ?다 보면, 우리의 존재가 ‘무’가 되고 만다.그래서 폴 틸리히(Paul Tillich)란 신학자는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라는 책 속에서 존재하고자 하는 용기를 갖고 살자고 주장하였다. 비존재의 위협 속에서도 존재의 향연을 이어가는 용기,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창세기는 우리에게 말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자리 안에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인 ‘혼돈’과 ‘공허’와‘흑암’을 치유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이 땅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제거한 전대미문의 힐링의 사건이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