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는 그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서 인생을 칠 막의 연극으로 표현했다. 그 희곡 2막 7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무대지요. 그리고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은 배우에 불과하고요. 모든 사람이 등장했다 퇴장했다 하는데, 한 남자는 평생 동안 여러 가지 배역을 맡고 그의 일생은 칠막으로 구성되지요. 처음에는 어린애인데, 유모의 품에 안겨 ‘으앙으앙’울고 침을 질질 흘리지요. 그 다음에는 투덜거리는 어린 학생인데, 가방을 멘 채 아침에는 빛나는 얼굴이지만 달팽이가 기어가듯이 마지못해 학교에 가지요. 그 다음에는 연인인데, 용광로처럼 한숨을 쉬고, 애인의 이마를 생각하며 슬픈 노래를 부르지요. ...중략.... 그리고 파란 많은 이 일대기의 끝 부분인 마지막 장면은 제2의 어린 아이의 시절인데, 오직 망각만 있을 뿐, 이빨도 없고, 눈도 없고, 미각도 없고, 아무것도 전혀 없는 거지요.”(해누리 p.78-81)
우리 네 인생을 참으로 잘 묘사했다. 그렇다. 이 땅의 우리 네 인생은 짧은 연극처럼 잠시 무대에 등장했다가 다시 소리 없이 사라진다. 아침 안개처럼, 들에 핀 꽃들처럼 그렇게 잠시 피었다 지고 만다. ‘생명의 덫 없음’을 논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기독교 경전은 두 종류의 생명을 말한다. 하나는 육신의 생명이고, 또 하나는 영혼의 생명이다. 육신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혼도 생명이 있다. 이 땅에서 우리 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면,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 하늘의 장막을 덧입는다. 바로 영혼의 생명을 누리게 된다. 주님은 이것을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는 말로 표현했다.
놀라운 말이다. 죽음은 인생의 종착점이고, 끝이고, 존재의 사라짐이다. 그래서 모든 문화와 문명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몸부림 치고 있다. 그러나 부활이요 생명이 되시는 주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문을 여는 통로이다. 그래서 주님은 밧모 섬에 있는 사도 요한에게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4:13)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