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언덕
심리학자들이 한 가지 실험을 하였다. 물이 절반쯤 담긴 큰 항아리에 쥐를 넣고 완전히 빛을 차단하여 캄캄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쥐는 1시간이 채 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그런데 똑같은 항아리에 쥐를 넣고 아주 미세한 빛을 비추어 주었다. 그랬더니 쥐는 무려 38시간이나 생존할 수 있었다. 왜 이런 차이가 일어났을까? 빛이 완전히 차단된 항아리에 갇힌 쥐는 체력이 소진되기 전에 먼저 희망이 소진되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세한 빛이 조명된 항아리 속의 쥐는 그 빛으로 인해서 한 가닥 삶에 희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삶에 대한 그 희망이 무려 38배 이상의 생존 시간을 연장시켜 준 것이다.
언제나 희망은 우리 삶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희망을 포기한 자리가 바로 죽음의 자리인 것이다.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은 그 자체가 미래의 문을 여는 희망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경우도 결코 쉽게 절망하지 않는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미래에 대한 희망 속에서 살아간다.
1995년 미스 아메리카에 당선된 헤더 화이트 스톤이라는 여대생이 있다. 그녀는 한 살때 접종한 디프테리아 주사의 부작용으로 어릴 때 청각을 잃고 살아온 장애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이런 신체적 콤플렉스와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미스 아메리카의 자리에 올랐다. 미스 아메리카는 그냥 몸매나 얼굴만 예쁘다고 선정되는 자리가 아니다. 교양과 인품과 여러 재능까지 평가해서 수많은 경쟁을 뚫고 선정되는 영예로운 자리이다. 정상인도 아닌 그녀가 그런 자리의 정상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이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장애가 있다는 조건이 당신의 의욕을 꺾지는 않았습니까?”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녀는 당당히 이렇게 말했다. “최악의 장애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신체는 멀쩡하지만 정신과 생각이 굴절되어 있거나 비뚤어져 있어 매사를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본다면, 그 사람이 가장 불쌍한 장애인인 셈이다.
헤더 화이트 스톤이 자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신의 삶에 희망을 갖고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뒤돌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21년 동안 어머니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나는 할 수 있다’(Yes, I can)'입니다.” 혹시나 장애인 딸이 의기 소침하거나 삶을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절망하며 살까 두려워서, 언제나 딸에게 ‘넌 할 수 있어’라는 믿음과 용기와 희망의 말을 해주었던 것이다. 멀쩡한 우리 아이들을 장애자로 만들면 안 된다. 지금 우리 자녀들은 용기와 위로를 주는 희망의 말을 절실히 필요로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넌 반드시 할 수 있어. 용기를 내.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실 거야. 엄마와 아빠가 언제나 널 위해 기도하고 있다. 잊지마. 힘내.”
성서 예레미야서에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소개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분이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29:11)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희망을 빼앗아가고자 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굴절시킨다. 너무 쉽게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든다.
유명한 신학자요 교육학자인 에밀 브루너는 “폐에 산소가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절망은 사탄의 언어이다. 그러나 희망은 하나님의 언어이다. 절망은 불신앙의 언어이다. 그러나 희망은 신앙의 언어이다. 절망은 죽음의 언어이다. 그러나 희망은 생명의 언어이다. 절망은 과거의 언어이다. 그러나 희망은 미래의 언어이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모두를 희망의 언덕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 안에서 절망을 넘어 희망을 노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