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상상력으로 기독교 경전읽기
창조의 아름다움 : 에덴의 행복
창조의 아름다움은 나와 너의 만남에서 완성된다.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을 바라보며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반복하며 감탄하였다. 그러나 딱 한 가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로 ‘홀로 살아가는 것’이다. 홀로 살아가는 것이 독립심도 있어 보이고, 어찌 보면 멋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해치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그 형상의 속성(관계의 속성)을 따라 관계 안에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관계의 단절은 행복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죄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 종교철학자인 마틴 부버(Martin Buber,1878~1965)는 그의 명저『나와 너(Ich und Du)』에서 인간은 세계에 대하여 두 가지 태도를 갖는다고 역설한다. 근원어 하나는 ‘나-너’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그것’이다. 인간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항상 ‘나-너’의 관계이거나 혹은 ‘나-그것’의 관계 속에 살아간다. ‘나-너’의 관계에서 ‘나’는 인격적 주체로서, ‘나’ 아닌 ‘너’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한다.
바로 ‘나’ 아닌 ‘너’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나’는 ‘나’가 된다. 반면 ‘나-그것’의 관계 속에서 ‘나’는 비인격적 객체로서, ‘나’아닌 ‘그것’을 비인격적 대상으로 만나고 경험한다. 바로 ‘나’ 아닌 ‘그것’과의 비인격적 관계 속에서 ‘나’는 ‘나’를 전체로서 파악하지 못하고 결국 ‘나’를 상실한다. 인간의 비극적 삶은 바로 이 ‘나-그것’의 관계에서 초래된다. 그러나 ‘나-너’의 관계를 무한히 연장하면 ‘나’는 ‘영원한 너’를 만난다. ‘영원한 너’와의 만남 속에서 비로소 전체로서의 ‘나’를 경험하게 된다. 행복은 바로 ‘나와 너’ 그리고 ‘나와 영원한 너’와의 만남 안에서 주어지는 하늘의 은총이다. 그렇다. ‘영원한 너’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과 인격적 관계를 맺기를 소망할 뿐 아니라, 인간 스스로 ‘나-너’의 인격적 관계 속에 살아가기를 열망하시는 분이시다. 결코 ‘나’ 홀로 독거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아담에게 ‘돕는 배필’인 ‘너’를 허락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영성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기독교의 영성은 단절의 영성이 아니라 관계의 영성이며, 개인적인 영성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영성이다. 불교는 개인의 참선을 통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 초대 교회의 역사를 보라!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한 자리에 한 마음으로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가 불의 혀처럼 나타났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1:13-14).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 계신다. 왜냐하면 사탄은 분열의 영이지만, 하나님의 영은 공동의 영(the communal spirit)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교회 공동체가 존재하는 영적인 이유이다. 하나님의 영을 경험한 사람은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을 체험한 사람들은 같은 영을 소유한 사람들과 나눔을 갖게 되어 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결코 독처하는 법이 없다. 진실로 하나님의 영을 체험하면, 더불어 살아가는 역사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관계의 회복이 일어나며, 목숨을 걸고 영적인 교제를 사모하게 되고, 그 영적 교제를 통해서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이렇게 형성된 것이다. 사도행전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위르겐 몰트만(Jϋrgen Moltmann)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Spirit)』를 저술한 신학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조지아 주 선교에서 실패하고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실의와 좌절과 절망 속에 있었다. 무엇인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떠났지만, 그는 첫 선교지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깊은 회의 속에서 그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종교적 모임에도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몸부림치면서 내키지 않은 마음을 달래며 작은 영적인 모임에 참석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을 체험하게 된다. 웨슬리는 그때의 상황을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저녁에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은 채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 있는 어느 모임에 갔는데, 거기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주석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대략 9시 15분 전쯤 되어 그가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역사를 하신다는 설명을 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믿는다고 느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나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생겼다.”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 비록 마음은 내키지 아니하였지만 모라비안 교도들의 작은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한 사람의 영적인 체험이 18세기 영국 사회를 송두리째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감리교의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영적인 단초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영적인 교제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 아니 그 반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 영적인 교제가 있다. 이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현실이다. 기독교 영성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던 자들이 한때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성령의 역사를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무지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 혹시 독처하고 있지는 않는가? 가정을 이루고 산다고 독처하고 있지 않는 것이 아니다. 대도시 군중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독처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거대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독처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나와 너, 그리고 ’나와 영원한 너’가 인격적 사귐과 만남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지 않다면, 우린 모두 독처하고 있는 것이다. 군중 속에서의 고독은 바로 우리가 독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에덴은 독처가 없는 세상이다. 에덴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이다. 그 에덴의 은총을 경험하는 행운이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