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상상력으로 기독교 경전읽기
창조의 아름다움 : 에덴의 행복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남북 분단의 현실을 주제로 세미나를 갖고 학회차원에서 고려왕조 500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개성을 방문했었다. 선죽교, 고려박물관, 박연폭포 등의 다양한 유적지와 명승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방문 후 한동안 큰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임진강에서 북측 군사분계선을 차로 넘어가는데 불과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남과 북 사이에 쌓아 놓은 ‘벽’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견고하게만 보였다. 짧은 시간 경험한 개성은 색이 없는 도시, 빛이 없는 도시, 그리고 자유가 없는 도시였다. 무엇보다 개성은 웃음과 기쁨이 없는 도시였다. 개성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가 하나같이 바라보기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어떻게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을까?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무엇이 그들에게서 기쁨과 웃음을 빼앗아 갔을까?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그들이 거처할 삶의 자리를 제공해 주셨다.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인류 최초의 보금자리는 바로 낙원이라 칭하는 에덴동산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창2:8). ‘에덴’이란 말의 히브리어 본래 의미는 ‘기쁨’ 혹은 ‘즐거움’이다.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하늘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에덴에서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시편 기자는 ‘복락의 강’을 표현할 때 에덴과 동일한 어근의 말을 사용한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시36:8).
라틴어 번역본인 벌게이트 성경(Vulgate Bible)은 ‘에덴 동산’을 ‘기쁨의 낙원’으로 번역하고 있다. 에덴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인간은 그곳에서 최고의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가 있었다. 에덴은 인류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아닐수 없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의해 폐허가 되어버린 채 광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덴의 축복을 약속하셨다.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51:3).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과 창화가 넘쳐 흐르는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에덴의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행복은 에덴의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할 때 비로소 찾아오는 하늘의 선물이다. 누가 에덴의 행복을 파기하였나? 하나님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인간 스스로가 그토록 갈망하는 에덴의 행복을 파기하고 말았다.분명 이것은 인류 최대의 실수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이기적 욕망과 쾌락을 대변하는 용어가 아니다. 진리가 변질될 때 가장 무서운 독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왜곡된 자아의 만족을 위해서 행해지는 찰나의 기쁨과 즐거움이다. 복음조차도 나의 만족과 나의 기쁨과 나의 즐거움을 위한 수단과 도구로 전락될 수 있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런 차원의 행복추구가 진정한 의미의 에덴의 행복을 빼앗아 간 것이다. 교회나 복음의 메시지가 부흥의 이름 아래서 세속적 기쁨과 즐거움에 마음의 문을 연다면, 돌이킬 수 없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C.S. 루이스(Lewis)는 그의 책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주된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로, 다소 역설적 표현이긴 하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행복은 우리의 존재의 변화에서 오는 것이지 행복 추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도 우리의 존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로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둘째로, 루이스의 시각에서 본다면, 에덴의 행복은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 존재적 의미에서 그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인간이 고통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끔찍한 피조물’로 전락되었기 때문이다. 결코 하나님이 살아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여전히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선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문제는 사람에게 있다. 스스로 에덴의 행복을 파기하였던 ‘끔찍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있다.
후기인상주의 대표화가이며 특별히 ‘낙원을 그린 화가’로 널리 알려진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의 3대 걸작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황색 그리스도>, <설교 후의 환상>이다. 특별히 고갱의 인생관, 세계관, 우주관을 한눈에 엿볼 수 있는 작품은 역시 그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이다. 검푸른 색조 가 바탕색을 이루는 폭 4미터에 달하는 벽화양식의 거대한 그림이다. 고갱은 낙원을 꿈꾸며 문명의 때가 전혀 묻어 있지 않을 것 같은 남태평양의 작은 섬 타히티로 떠난다. 그러나 그곳에서 고갱은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낙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갱은 그곳에서 인간 실존이 경험하는 극심한 고독과 끝없이 밀려오는 절망과 싸워야만 했다. 결국 고갱은 그의 대작을 완성한 이후 홀로 산속으로 들어가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예술적 영역에서 인간의 탄생과 삶, 그리고 죽음을 가장 종합적 화법으로 묘사한 천재 화가 고갱,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낙원은 아직도 인류에게 신비로운 신기루로 남아 있다. 그의 작품은 마치 기독교의 경전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가져다준다.
낙원을 향한 인류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다. 즉 에덴의 행복을 회복할 수 있는 제2의 기회를 허락해 주셨다. 사도 요한은 그 기회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3:16,17).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서사시인 존 밀턴(John Milton)은 그의 명저 『복낙원(Paradise Regained)』에서 그것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내 일찍이 행복의 동산을 노래하였도다 / 그것은 한 사람의 불복(不服)으로 인하여 잃은 것 / 내 이제 노래하노니 온 인류에게 낙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잃어버린 에덴의 행복을 경험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