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상상력으로 기독교 경전읽기
창조의 아름다움 : 참 나를 찾아서(6)
유학시절 갑상선 암으로 6개월간 투병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어느 목사님 사모님을 가까이서 돌보아 드린 일이 있다. 미국 대학 병원은 구조도 복잡하고 의학 용어들이 어려워 환자 보호자를 위한 특별한 통역이 필요했다. 필자는 학위를 위한 모든 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쓰고 있었던 터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마지막 임종 몇 주를 남겨놓고 주치의로부터 최종 진단서를 받게 되었다. 진단서 종이에는 딱 한 글자만 대각선으로 크게 적혀 있었다. 바로 ‘Terminal’ 이었다. 필자는 그때야 비로소 그 단어가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사용되는 의학적 용어인 것을 알게 되었다. ‘터미널(Terminal)’ 즉 인생의 종착역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말은 더 이상의 치유의 과정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인생의 종착점에 이른다. 시작이 있으니 반드시 끝이 있을 것이다. 그 끝이, 끝이 아닌 영원한 시작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여섯 번째 신학적 의미는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영원성(Eternity)’은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이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불멸적 존재(Immortal Being)’로 정의해 왔다. 기독교 경전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와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공히 이렇게 계시해주고 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은 곧 하나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며, 시간 이전의 영원한 존재임을 선언한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나타내고 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22:13). 여기서 ‘처음’과 ‘마지막’은 상대적 시간의 처음과 상대적 시간의 마지막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 시간의 처음과 절대적 시간의 마지막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 속에 영원한 현재로 현존하시는 영원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이렇게 노래한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100:5).
기독교 경전에 나타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언제나 ‘영원성’을 담보하고 있다. ‘영원한 언약’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 시편 기자가 노래한 하나님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삶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7,8).
실낙원의 가장 큰 저주는 곧 영원성의 상실에 있다. 낙원에서 아담을 추방하시면서 하나님이 하신 저주는 이것이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9).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영원성을 따라 창조된 영원한 존재였다. 즉, 죽음이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므로 영원성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상실되고 말았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은 무서운 존재의 저주이다. 이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죽음은 존재를 비존재화(Non-being)시키기 때문이다. 흔적도 없이 우리의 존재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런 존재를 ‘유한한 존재’(Finite being) 혹은 ‘실존’(Dasein)으로 표현해 왔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인생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네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하며 이렇게 묘사한다. “. . .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40:6-8). 시편 기자는 인생을 이렇게 비유한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144:3,4). 그렇다. 낙원 밖에 던져진 인생은 한 여름 밤에 꿈을 꾸는 것같은 일각의 순간을 사는 유한한 존재일 뿐이다.
미치 앨봄(Mitch Albom)의 책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Tuesdays with Morrie)』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어느 한 교수의 이야기를 써 놓은 작품이다. 모리 교수와 그의 제자 미치가 모리가 세상을 떠나기 전 서너 달 동안 매주 화요일에 만나 인생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글이다. 그 글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모두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작 누구도 자기가 죽는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가장 지혜로운 인생은 자신의 인생에 끝이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마치 모래시계처럼 그렇게 인생의 종착점은 다가오고 있다. 하루를 살았다는 것은 하루만큼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 가까이 왔다는 말이다. 누가 이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덧없는 우리네 인생에 희망의 새 빛이 비추어졌다. 우리 네 인생의 끝이, 끝이 아닌 ‘영원’을 향한 새로운 시작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길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할 때 비로소 열리는 길이다. 의심 많은 도마를 향하여 주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주님 안에서 우리는 다시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영원한 존재로 새롭게 창조되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바로 이것을 위한 산 표증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죽인 사건’이다. 주님 안에서 다시는 죽음이 없는 삶을 선언하신 것이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오늘도 시간 속에서 영원을 맛보는 하늘의 은총이 있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