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상상력으로 기독교 경전읽기
창조의 아름다움 : 참 나를 찾아서(4)
과학 기술 문명의 학대 아래서 잠시 휴지통에 버려졌던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이 새롭게 기지개를 펴고 있다. 최근 플라톤 아카데미와 경희대학교의 공동 후원으로 인문학 강연 “나는 누구인가?(Who am I)”가 많은 이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열리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른 채, 진정 인간을 위한 문명을 발전시킬 수가 있겠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 사실 인문학의 최고의 교과서는 성서이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창세기는 그 인문학적 비밀을 말해주고 있는 최고의 책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네 번째 신학적 의미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근세철학의 새장을 열었던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에서 신의 현존을 두 가지 방식에서 증명하였다. 하나는 신이 자신의 창조물 속에 펼쳐 놓은 결과들을 토대로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후천적 혹은 인과론적 증명이다. 또 하나는 신의 본성 그 자체를 고찰함으로써 신의 현존을 이끌어 내는 선천적 혹은 존재론적 증명이다. 두 증명은 서로 다른 출발점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종착점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신의 전능성’이다. 전자의 증명에서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에, 후자의 증명에서는 “필연적 현존을 산출할 수 있는 능력”에 도달함으로써, 두 증명 모두가 결국 신의 전능성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기독교의 경전인 창세기는 이미 인간 앞에서 신 자신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창17:1)라고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셨다. 신학자들은 이런 하나님을 ‘전능한 존재’(omnipotent Being)로 칭하고 있다.
‘전능성’은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그 전능성을 인간에게도 부여해 주셨다. 왜냐하면, 창조의 행위는 곧 존재를 분유(分有)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만큼은 아니지만, 하나님처럼 인간도 신적 전능성을 소지한 존재로 창조되었다.인간의 전능성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많은 분야에서 행해지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보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담보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다. 고혈압의 흑막인 효소 ‘레닌’의 유전자 해석에 성공하여 세계적인 인물이 된 무라카미 카즈오(Murakami Kazuo)는 그의 책 『유전자 혁명』에서 인간 유전자의 심오한 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힘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숨을 쉬는 것도, 혈액이 순환하는 것도 우리들 자신이 노력하여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호르몬계, 자율신경계 등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카즈오에 의하면, 인간은 평균 6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세포 속에는 막으로 둘러싸인 핵이 있고, 그 핵 속에는 유전자가 있다. 사람의 유전자는 초미세 구조이다. 이 유전자 안에는 30억 개의 A.T.C.G 4개의 화학문자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책 10.000권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이 정보가 중량 1g의 2,000억 분의 1, 폭이 1mm의 50만 분의 1이라고 하는 초미세한 테이프 속에 담겨 있다. 좀 더 실감나게 설명하면 이렇다. 1g의 2,000억 분의 1의 무게인 DNA를 현 지구상 70억 인구 분을 다 모아 놓아도 쌀 한 톨 정도의 무게에 불과하다. 상상이 가는가? 어떻게 이렇게 초미세 구조 속에 그런 엄청난 존재의 설계도를 그려 넣을 수 있는가? 무라카미 카즈오는 ‘그 무엇인가 위대한 어떤 존재’(Something Great)가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가 기독교 신자였다면 이런 애매한 표현 대신, 그 존재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무라카미 카즈오에 의하면, 유전자 정보가 On 혹은 Off 됨에 따라 인간의 삶이 결정되는데, 실제로 작동되고 있는 유전자는 불과 5% 정도라는 것이다. 나머지 95%의 유전자는 아직 인간의 몸속에서 Off 상태로 잠자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잠자고 있는 좋은 유전자들이 잠에서 깨어난다면, 인간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잠자는 좋은 유전자가 잠에서 깨어 날 수 있을까? 무라카미 카즈오는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다고 한다. ‘플러스 발상’과 ‘마이너스 발상’이 그것이다. ‘플러스 발상’은 긍정적인 생각을 의미하고, ‘마이너스 발상’은 부정적인 생각을 의미한다. 사람이 강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하룻밤 사이에도 머리가 하얗게 흰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면 하룻밤 사이에도 회춘을 경험한다. 플러스 발상은 엔트로피의 감소를, 마이너스 발상은 엔트로피의 증대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전인 잠언은 이미 이 사실을 이렇게 간파하였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서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만일 무라카미 카즈오가 기독교 영성을 알았다면, 그는 분명 인간의 잠자는 유전자를 깨우는 힘이 믿음이라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은 하나의 추상명사가 아니다. 믿음은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동사이다. 믿음이 들어가면 가장 먼저 우리마음의 생각이 바뀐다.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믿음은 언제나 ‘플러스 발상’이다. 믿음이야말로 잠자는 하나님의 전능성을 깨우는 열쇠가 된다. 예수는 말한다. “. .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오래 전에 “올인”이란 드라마가 온 국민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었다. 주인공 이병헌이 라스베가스에서 세계적인 겜블러가 되는 장면이 나왔다. 세계적인 겜블러가 되기 위해서는 ‘올인(All In)‘을 잘 해야 함을 알았다. ’올인‘은 승부사의 타고난 감과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두툼한 배짱이 동시에 작동되는 순간이다. 승부사들은 단지 30%의 확률만 있으면 올인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올인‘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30%의 믿음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의 말처럼 우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기는 기적을 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으로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전능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의 유전자 정보는 거의 대부분이 아직 해독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생물학적 차원에서도 아직 인간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물며 어떻게 우리가 인간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차원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본래 인간은 우리의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훨씬 더 전능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능성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고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이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의 단절을 가져왔고, 그 결과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인, 전능성이 상실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보내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잃었던 하나님의 전능성이 회복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