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상상력으로 기독교 경전읽기
창조의 아름다움 : 참 나를 찾아서(3)
제주도에 갔다가 우연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탈리아가 낳은, 지구상에 존재했던 가장 경이로운 인물이 바로 레오나르도이다. 2003년 3월 미국 작가 댄 브라운(Dan Brown)이 펴낸 『다 빈치 코드』는 출간과 동시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다 빈치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다 빈치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세례요한>, <그리스도의 세례>, <지네브라 데 벤치의 초상>, <성 히에로니무스>등 놀라운 예술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일 뿐 아니라 건축가, 발명가, 기계공학자, 해부학자, 수학자이기도 하다. 그의 지적 호기심은 인류문명의 토대가 되는 전 영역을 넘나들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500년 전 그는 이미 최초의 세계지도, 증기선, 인체해부도, 자궁 속 태아의 모습, 헬리콥터, 비행기, 잠수복, 엘리베이터, 자동차, 시계, 굴착기, 자전거, 탱크, 망원경, 낙하산, 크레인, 다연발 대포 등등 세기를 뛰어넘는 위대한 발명과 실험을 시도한 인물이었다. 레오나르도의 작업실을 들여다보면, 마치 창조자의 작업장을 방불케 하는 인상을 갖게 해준다.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되었던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의 천재성을 알았던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CEO였던 빌 게이츠는 1994년 크리스티 경매에 붙여졌던 그의 노트 한권을 무려 한화 350억원에 구입하기도 하였다. 어떻게 한 사람의 지적 능력이 이렇게 위대할 수가 있을까? 그의 모든 지적 능력이 그를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세 번째 신학적 의미는 인간은 사유할 줄 아는 지적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우둔함이 인간의 지혜를 초월한다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이렇게 찬양하였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요,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그래서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전지한(Omniscient) 존재로 칭해왔다. 하나님의 전지성은 곧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이 놀라운 지적인 속성을 인간에게도 허락하여 주었다. 하나님만큼은 아니지만, 하나님처럼 인간도 지혜의 존재가 된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런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 혹은 ‘생각하는 갈대’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인간의 이성을 부정적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지혜의 통로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일하신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사건인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기록되었나? 인간의 이성적 작업을 통해서 그 시대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인간의 이성적 작업이 없이는 결코 기독교의 경전인 성서는 우리에게 주어질 수 없었다. 흔히들 말씀을 듣거나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말씀에 은혜 받는 일이 우리의 이성적 작용 없이 가능한 일일까? 불가능한 일이다. 깨달음은 이성적 작용을 통해서 행해진다. 은혜를 사모하는 이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통로인 이성을 경시하거나 무시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이성을 두 가지 영역으로 구분하여 생각하고 싶다. 하나는 ‘왜곡된 이성’이고, 또 하나는 ‘성화된 이성’이다. 왜곡된 이성은 죄로 인해 낙원을 상실한 인간 이성이다.그러나 성화된 이성은 사죄의 은총으로 죄 사함을 받은 인간 이성이다. 죄로 인해서 왜곡된 이성은 우리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이성은 우리의 삶을 생명과 평안으로 인도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5,6). 물론 플라톤(Platon, BC 427~BC347)의 말처럼 인간의 이성이 이끄는 마차에 올라타면 무조건 인류가 유토피아에 이른다는 주장은 아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성을 이야기할 때, 어떤 이성을 말하고 있는지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이성이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또한 동시에 모든 이성이 긍정적인 것도 아니다.
초대교회의 오리겐(Origen, 185?~254?))은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대립적 관계가 아니라 조화와 통일의 관계로 보았다. 여기서 오리겐이 생각하는 이성은 성화된 이성을 의미한다. 반면에 터툴리안(Tertullianus, 160-220)은 신앙과 이성을 대립적이며 배타적인 것으로 보았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여기서 터툴리안이 생각하는 이성은 아마도 왜곡된 이성 혹은 이성의 한계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중세 스콜라주의는 우리가 믿고 있는 바를 설명하거나 확고히 하기 위해서 이성을 높은 차원의 가치로 여겼다.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은 “지식을 추구하는 신앙”을 통해서 신앙의 합리성을 입증하고자 시도하였다. 스콜라주의의 절정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이성의 합리성을 통해서 그 유명한 신존재증명을 완성하였다. 그들 스스로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여기서의 이성은 성화된 이성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보여 진다.
종교개혁을 전개하며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성에 대한 다른 견해를 보인다. 루터는 이성을 세상 앞에서의 이성과 하나님 앞에서의 이성으로 구분하였다. 세상 앞에서 이성은 매우 놀라운 문명의 이기를 창출하는 인간의 고귀한 도구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성은 참으로 무가치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자신의 의지를 통제할 능력도 없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힘도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의 한계를 말한 것이지, 결코 이성(reason)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의 감리교 운동을 연구해보면, 웨슬리가 인간의 이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웨슬리는 이성을 그의 신학과 영성을 위한 네 가지 기둥 중의 하나로 보았다.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이성은 바로 성화된 이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왜곡된 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1965) 역시 그의 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이성과 계시의 긴밀한 관계를 상관관계의 방법 안에서 추구했다. 이처럼 초대 이래로 신학의 전 영역에서 “이성(Reason)과 계시(Revelation)” 혹은 “신앙(Faith)과 이성(Reason)“의 문제는 신학의 주요한 주제로 끊임없이 논의되어 왔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지적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재란 증거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최고의 지혜자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이 솔로몬이다. 솔로몬은 다윗의 대를 이어 보위에 올랐을 때 가장 먼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린다. 그리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지혜로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할 길이 없다고 자신의 이성을 통해서 자각했기 때문이다. 왜곡된 이성이 자신의 이성의 한계를 자각하고 성화된 이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고자 한 것이다.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 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3:9-10).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의 모습에 감동된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수도 모두 허락하여 주셨다. 솔로몬의 지혜는 성화된 이성을 통해서 빛난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 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