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상상력으로 기독교 경전읽기
창조의 아름다움 : 참 나를 찾아서(1)
고대 그리스의 철인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 ~ BC 399)는 “너 자신을 알라”는 명언을 통해서 무지로부터의 인간 해방을 외쳤다.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는 선악을 분별할 줄 모르는 무지에 기인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참 지혜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당신은 어떤 존재인가? 이것은 인류사 이래로 수없이 제기 되어온 질문이다. 인간 스스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를 갈망해 왔으나 누구 하나 선명하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해 주지 못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전인 창세기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분명하게 정의해 주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인간이 존엄한 이유가 여기 있다. 빈부의 차이, 인종의 차이, 성별의 차이,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창세기의 인간이해는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의 기초가 되었다. 1948년 12월 10일 제3회 국제연합(UN)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문이 채택되었고, 1950년 제5회 UN총회에서 12월 10일을 세계인권 선언일로 선포하고 기념해 오고 있다.
왜 하나님이 한 인간을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 여기셨을까?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그 어떤 외형적 모양이나 모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존재의 속성’이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존재의 속성을 따라 창조되었다. 물론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칼 바르트(Karl Barth)의 말처럼, 창조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 사이에 엄연히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첫 번째 신학적 의미는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영이시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설사 안다고 해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 안에서 참 자신을 발견할 수 없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새로운 인간 창조의 기록이 나온다. 그 기록에 보면, 역시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생령 즉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과 영적 교제 즉, 영적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할 수 있다는 근거이다.
새롭게 인문학(humanities)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인문학은 인간이 누구인가를 알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는 학문적 영역이다. 한국 가정에서 한 달 소비되는 지출비중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자녀 교육비이다. 유아의 조기교육에서부터 초등학생들의 사교육 열풍 등 어느 가정이든 교육비는 가계의 가장 큰 지출을 차지하고 있다. 요즘은 조기 유학이나 해외 연수까지 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 액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계 지출비중에서 둘째로 많이 차지하는 것이 Well-Being을 위해서 건강에 투자하는 비용이다. 몸에 좋다는 음식, 몸에 좋다는 운동에 아낌없이 투자한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자! 정작 자신과 자녀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고 있는가? 영으로 창조된 자녀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는 일에 한국 크리스천 부모들은 너무도 인색하다. 자녀들의 교회생활을 시간 낭비로 생각하는 크리스천 부모들이 늘어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진정으로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존귀하게 쓰임 받는 Well-Being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영적인 세계를 개발하는 일에 아낌없는 투자를 해야 한다.
과거에는 사람을 지능지수 I.Q (Intelligence Quotient)로 평가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가 지적인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했다. 요즘은 E.Q (Emotional Quotient) 즉 감성지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무리 I.Q가 높아도 E.Q가 좋지 않으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바로 S.Q(Spiritual Quotient) 즉 영성지수이다. 아무리 I.Q와 E.Q가 좋아도 S.Q가 부족하면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다. 영으로 창조된 우리의 영혼이 잘 될 때 범사가 형통해지는 역사가 나타난다. 사도 요한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미국 헐리우드 유태인 지역에서 25년 동안 가죽 가방을 취급하는 사업을 하고 있는 김 집사님을 알고 있다. 집사님은 사업과 자녀 교육에 큰 성공을 이루신 분이다. 집사님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늘 하시는 이야기가 있다. “목사님! 유태인들하고는 경쟁해서결코 이길 수가 없어요. 차라리 그들과 함께 사업을 하는 것이 최상의 경영 전략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김 집사님의 경험에 의하면, 유태인들은 사업에 실패는 해도 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있다가는 다시 일어서는 것을 수없이 관찰해왔다는 것이다. 집사님이 경험한 바로는 그들은 어떤 실패에도 결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들이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은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김 집사님 말에 의하면, 유태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고난 뒤에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훈련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의 비밀이다. 여기서 한국인 크리스천 이민 가정과 차이가 난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 실패하게 되면 아버지만 사업에 망하는 것이 아니다. 보통의 경우 가족 전체가 붕괴되고 만다. 아내는 아내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그 고난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너무 쉽게 무너져 내린다. 영적인 위기관리 능력이 배양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좋을 때는 좋지만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오면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 영이신 하나님 안에서만 인간은 참으로 행복할 수 있다. 하나님 안에서 영성 지수를 높이는 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