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상상력으로 기독교 경전 읽기
창조의 아름다움 : 창조의 의미
최근에 창조경제란 말이 화두가 되었다. 기업은 기업대로 창조경영을, 나라는 나라대로 창조한국을 기치로 내걸었다. 과연 창조란 말의 의미를 알고나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창조란 말은 본래 기독교 경전에서 유래된 말이다. 창조란 신적인 용어이지 인간의 영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창조하다”(bara)와 “만들다”(asah)는 선명한 차이가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에서 창조의 행위는 ‘아무것도 없는 절대 무(無)의 상태에서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절대 유(有)의 상황’을 창출해 내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만들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이전에 없었던 무엇인가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 내었을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사실 인류의 과학 문명은 모두가 창조의 영역이 아닌 만듦의 영역에서 진보되어 왔다. 아무리 과학 문명이 발달했어도 인간은 그 미소한 아메바의 유전 정보조차 창조해 낼 수 없다. 인간은 단지 아메바 안에 유전 정보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의 의미를 새롭게 해독해 낼 뿐이다. 창조경제, 창조경영, 창조한국이란 말은 창조란 용어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말이거나 아니면 인간의 존재의 자리를 망각한 무서운 교만에서 비롯된 신성 모독적 말인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창조를 두 가지 차원에서 정의한다. 첫째로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이다. 창조의 주어가 되시는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절대 무(omnino nihil)’에서 무형의 질료인 ‘거의 무(prope nihil)’를 창조하셨다. 창조자의 전능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현존하시는 분(omni-present Being)이신데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절대 무의 공간이 가능했을까? ‘절대 무’란 하나님의 현존조차 인정되지 않는 실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의 공간이다.어떻게 하나님이 모든 곳에 현존하시는데 그런 무의 공간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길은 있다. 하나님 편에서 자신의 존재의 속성인 ‘현존성’을 포기하면 가능하다. 즉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omni-potent Being)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의 속성을 포기하면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창조의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의 속성인 ‘현존성’을 포기하였을까? 답은 이것이다.하나님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창조는 사랑의 행위이다. 이것을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 사랑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amore Dei)’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표현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지 않으셨다면 천지 창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사랑으로부터의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의 신비를 벗겨준다. 흔히들 이런 질문을 던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분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되신다면 어떻게 그분이 십자가 상에서 죽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신데 말이다. 하나님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영원한 존재(eternal Being)이시다.그런데 어떻게 그분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가짜 죽음으로 보기도 하였다. 기독교 이단 사상 중의 하나인 가현설(假現設Docetism)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완전히 부인하였다. 가현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을 모두 부인한다. 그 모든 것은 진짜가 아니라 단지 육체처럼 현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 상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며 고통가운데서 죽으셨다.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있고,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을까? 해답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전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사도 바울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이렇게 기록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5:6-10).
창조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사건이었듯이, 십자가 역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사건인 것이다. 어떻게 십자가의 죽음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은 어떻게 무로부터의 창조가 가능할까? 라는 질문과 궤를 같이한다. 해답은 하나다. 사랑 때문에 가능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친히 자신의 존재의 속성인 ‘영원성’을 십자가 상에서 포기하셨다. 어찌 보면 십자가는 사랑 때문에 하나님 스스로가 하나님 되시기를 포기한 사건이다. 창조의 영성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십자가의 영성과 만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자기 포기와 자기 희생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고,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었다. 우린 모두 그 사랑에 빚진 자들이다. 사랑에 빚진 자다운 삶이 우리네 삶이 되길 소망해 본다.